있는 돈 없는 돈 박박 긁어 떠난 유학, 한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여행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극 I의 외국살이는 일상이 긴장이라 더 누워 있고, 더 멍 때리고 싶었다. 그래도 런던 근교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튼 당일치기는 항상 환영이었다. 런던에서 가깝고, 교통 편하고, 바다, 도시, 쇼핑 모든 것이 있었다. 게으른 런던 집순이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런던 - 브라이튼, 버스도 기차도 오케이
런던에서 브라이튼을 가려면 버스를 타도 되고, 기차를 타도 된다. 브라이튼 시내는 있을 거 다 있지만 넓지 않아서 기차건 버스건 내리는 것도 거기서 거기라 무엇을 타도 괜찮다. 소요 시간도 1시간 30분에서 2시간 내외. 집에서 가까운 세인트 판크라스 St. Pancras역에서 기차를 타면 되지만 나는 웬만하면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까지 가서 버스를 이용했다. 이건 기차표를 끊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그 간단한 과정마저도 귀찮아하는 특이한 성격 탓이라 큰 의미는 없다. 그때는 당일치기 왕복 티켓이 20파운드 이내였던 것 같다. 버스는 더 저렴했던 것 같기도 하고.
세븐 시스터즈에 간다면 브라이튼 원데이 패스가 냥이득
브라이튼 시내는 도보로 다 돌아볼 수 있지만 세븐 시스터즈 절벽 Seven Sisters Cliff를 방문할 경우 원데이패스를 구매하는 게 이득이다. 편도 요금 2번 이용하는 것보다 저렴하기 때문. 아래 사진처럼 종이 복권 긁듯이 날짜를 긁으면 하루 종일 모든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전자칩 같은 테크놀로지 일절 없는 파란 종이가 나는 너무 귀여워서 버리지 않았다. 그때도 5파운드 언저리였던 것 같은데 찾아보니 요즘도 5.5파운드 정도로 비슷하거나 조금 오른 듯.
세븐 시스터즈에 가고 싶은 날은 아침 먹고 역 근처 시계탑 앞에서 바로 버스에 올라타는데 12A나 12X 아무거나 상관없지만 12X가 조금 덜 돌아간다. 요즘은 절벽으로 바로 가는 13번도 있다는데 타보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세븐시스터즈 절벽 자체보다 절벽을 향해 걸어가는 하이킹 여정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다시 가도 12번 라인을 탈 것 같다.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브라이튼에서 이스트본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잠들고, 그러다 다시 깨면 세븐 시스터즈에 가까운 East Dean에 도착해 있다. 셔틀버스나 다름없어서 모두 내릴 때 우르르 내리면 된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향한다.
양, 멀리서 봐야 순하다
영국에 2년 넘게 살았지만 아일랜드를 가보지 못했다. 세븐시스터즈로 향하는 들판을 걸으면서 아일랜드의 들판이 이런 모습은 아닐까 상상하곤 했다. 영국의 자연은 유럽 대륙의 자연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는 우아하고 잘 가꾸어진 느낌이라면 영국의 자연은 반항적이고, 거칠고, 그래서 더 살아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한 번씩 두려워질 정도였다. 들판을 걷다 보면 아주 착해 보이는 양들을 만나게 되는데 한 번은 양 구경을 하느라 길을 놓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무리에 낀 적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말 그대로 양처럼 순해 보였지만 나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며 달려오는(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양들을 피해 울면서 도망간 적 있으니 주의. 양 님들은 멀리서 봐야 순하다.
저 절벽 끝에 서면
절벽에 다다르면 이 세상 같지 않은 풍경이 펼쳐진다. 저 건너는 노르망디라고 들었는데 우주 끝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판에서 아일랜드를 떠올렸듯 가보지도 않은 또다른 몇 곳을 떠올리며 그곳도 이런 느낌일까 상상하곤 했다. 나는 이 세상 같지 않은 풍경을 만나면 벅차기보다 겁이 난다. 그래서 감탄하면서도 항상 불안하다. 이 자연이 나를 삼켜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저 절벽 끝에 서면 자연에 압도되어 몸을 던져버리는 건 아닐까? 높이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무서워서 항상 절벽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타입이다. 그래서 나는 들판을 걷는 게 더 좋았다. 같은 이유로 이웃에 위치한 헤이스팅스의 바다 보다 라이의 골목길이 좋았다.
월미도여, 브라이튼이여, 여기가 어디여
거기서 거기지만 돌아오는 버스는 기차역이 아니라 부둣가에서 내리면 된다. 브라이튼 하면 떠오르는 브라이튼 부두 Brighton Pier에 들러 바다 한번 또 바라봐줘야 한다. 내가 부둣가에 갈 때면 항상 날씨가 구리구리했는데 이마저도 그렇게 좋았다. 남들 사진 보면 화창한 해변에 사람들이 선탠도 하던데 내가 가는 날만은 항상 구리구리하고 으슬으슬했다. 나는 브라이튼 피어를 브라이튼 월미도라고 불렀는데, 인적 없고 키치한 놀이공원과 오락실에 괜히 한번 들어가 보곤 했다. 생각해 보니 영국은 항상 물가에 저런 오락실이 있더라 템즈에도 있는데 처음엔 누가 저기서 노나 했었다. 그런데 이년 정도 지나니 내가 저기서 그란 투리스모 타고 있더라.
당연히 화창하면 더 예쁘지
브라이튼은 세븐시스터즈와 해변이 다가 아니다. 그 손바닥만 한 시내가 너무 재미있다. 헤이스팅스 Hastings 같은 다른 해변 도시도 가봤는데 브라이튼 보다 크고 온갖 상점들이 다 있어도 사람도 풍경도 뭔가 시골 같았는데, 브라이튼은 항상 뭔가 힙하다. 세븐 시스터즈의 자연에 압도되어 내려오면 런던 못지않은 세련된 시내가 펼쳐진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바다도 좋고 자연도 좋지만 도시도 좋은 나에게 브라이튼은 살고 싶은 도시였다. 아마 영국에 오기 전에 브라이튼을 알았다면 분명히 브라이튼 대학교를 선택했텐데.
묘하게 좋아해, 브라이튼 로열 파빌리온
로열 파빌리온의 인상은 참 묘하다. 영국식 하늘, 영국식 정원에 이슬람, 인도 양식의 건축물이 서 있고 내부는 또 중국식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나라들과 무슨 사연이 있나 했더니 그렇지는 않고 유명한 왕실 건축가인 존 내쉬가 지었고 조지 4세가 내연녀와 함께 지내기 위해 지은 별궁이라고 한다. 지금은 브라이튼 박물관과 갤러리고 사용되고 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로열 파빌리온이 영국식 정원에 서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해변과 시내 사이 항상 지나칠 수밖에 없기도 했고, 정원을 걷는 것이 좋아서 꼭 들리기도 했다. 꽃도, 새도, 풀도, 건물도 묘하게 안 어울려서 재미있는 곳.
브라이튼 하면 베트남 쌀국수지
다시 말하지만 브라이튼은 구리구리한 날 가야 한다. 세븐시스터즈-브라이튼 피어-로열 파빌리온-시내까지 쫙 돌고 으슬으슬한 몸을 이끌고 베트남 쌀국숫집 PHO에서 뜨끈한 쌀국수 한 그릇 하면 세상이 내 거 같고 오늘 여행 좀 했구나 괜히 으쓱해진다. 이래서 어르신들이 해장국을 그렇게 드셨던 걸까? PHO는 사실 런던에도 있는 체인점인데 가격도 적절하고 맛도 있고 양도 많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집에 돌아가기 전 저녁을 먹을 때 즈음이면 항상 으슬으슬해서 꼭 베트남 쌀국수로 마무리하고 차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나와 친구들 사이에서 브라이튼 가면 쌀국수 한 그릇이 공식이 되어버렸다. 브라이튼 여행은 구리구리해야 제 맛이 아니고 항상 구리구리했던 걸까?
Pho / 주소 12 Black Lion St, Brighton BN1 1ND, United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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