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5개월을 보내고 도착한 곳은 하노이였다. 우리는 하노이 공항에 마중 나온 Elise를 만나 하노이 근교 공업 도시로 유명한 박닌 Bac Ninh 초입쯤 위치한 작은 마을 Hien Van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위치한 아티스트 레지던시 Live, Make, Share에서 세 달간 머물기 위해서였다.
아티스트 레지던시가 뭐야?
아티스트 레지던시는 이름처럼 아티스트를 위한 공간이다. 운영하는 개인 혹은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일정한 기간을 정해 선정된 아티스트에게 작업공간, 주거 공간 혹은 두 개 다 제공한다. 무료도 있고, 유료도 있고, 어떤 곳은 무료에 체류 기간 동안 아티스트 피를 주는 곳도 있다. 유료 레지던시는 보통 아티스트들이 국내외 기관의 지원금을 받아 가는 경우가 많다. Live, Make, Share는 선정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Elise의 Undecided Production이 Hien Van의 Hien Van Ceramics와 협력하여 운영하는 유료 레지던시다. 우리는 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았지만 한 사람당 200달러 정도(한 달)로 저렴하고 프로젝트에 진행한 재료비 등은 Undecided Production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큰 부담은 없었다.
숙소 겸 작업실은 Hien Van의 오래된 저택이었다. 유명한 화가였던 할머니(우리는 Ba라고 불렀다)의 가족들이 머물던 곳으로 지금은 레지던시가 없을 땐 아무도 살지 않는다. 폐가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낡은 곳이어서 지낼 때는 불편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돌아온 지금은 어디보다 더 기억나는 곳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그래서 더 그리운 걸까.
이겨내지 않아도 됨,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자
머무는 내내 모든 감각이 항상 예민하게 열려 있었다. 유리는 커녕 모기장도 없고, 나무문 아래도 열려 있어 다양한 곤충,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정원의 울창한 풀더미와 연못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밤새 빗소리,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다. 나는 천상 도시녀다. 어디 가든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자연스러운' 환경에서는 얼어버린다. 마치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집에는 쥐도 있고, 뱀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었다. 이름 모를 애벌레도 나무에서 한창 매달려 있다. 때론 공포스럽기도 했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두려워서 미칠 때는 하노이 시내 서호 인근에 몰래 얻어 놓은 집에서 에이컨을 쐬고 넷플릭스를 봤다. 편하게 샤워하고 습기 찬 옷들을 뽀송뽀송한 건조기에 돌렸다.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지내다 도망가고 다시 돌아오길 반복했다. 무엇이건 이겨내야 할 의무는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을 해도 되는 곳
Live, make, share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을 해도 되는 곳이었다. 세라믹 작업을 하고 싶으면 Hien Van Ceramics 공방에 가서 자리를 잡아 만들면 되었고, 누워 있고 싶으면 누워 있으면 되고, 작업하고 싶으면 작업하면 되는 곳. 지금 생각하면 더 늘어져도 좋았을 텐데 그때 우리는 무언가를 하려고 계속 분주했다. 물론 동네 아이들과 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워크숍은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시간이 나면 동네를 돌아다녔다. 히안반 Hien Van 은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모습이 묘하게 섞여 있다. 인공 호수와 논밭, 도시의 쓰레기, 풀더미, 오래된 집과 새집이 모두 뒤섞여 있어서 그 정체를 알기가 힘들다. 지금도 모르겠다. 그냥 구석구석 내 영역과 다른 모습들을 구경하고 다니는 게 재밌었다. 나무 타는 거대 쥐를 만나고, 알 수 없는 잔해를 보고 기겁해서 산책은 항상 조마조마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운 좋은 날은 광장 할머니 매점에서 사탕수수 주스 느억 미아 nuoc mia 한잔 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물론 더러운 천에 얼음 덩어리를 싸고 방망이로 뚜드려 패서 만드는 제조 과정은 흐린 눈 필수.
밥을 같이 먹는 우리, 식구지 뭐
공동생활은 쉽지 않다. 우리는 그 기수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팀이었다. 우리가 머무는 세 달 사이 새로운 아티스트들이 머물다 떠나기도 했고, 계속 같이 지낸 친구도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생각의 사람들이 머무는 터라 트러블 아닌 트러블도 있었다. 자연과 너무 가깝고 너무 다른 환경에서 모두가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사이가 좋다가 나쁘다가 하며 전반적으로 모두와 잘 지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지만 끈끈한 동료였다. 마을에 식당이 없어서 동네 꼬마 선샤인네 집에서 돈을 내고 끼니를 해결했는데, 거의 매끼 같이 밥 먹다 보니 선샤인 가족과 아티스트들 모두 결국엔 식구가 되었다.
불편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자극이 되는 곳, Live Make Share
아티스트 레지던시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새로울 것 없는 형태가 되었다. 개인 혹은 작은 단체에서 시작되던 것이 인기를 끌면서 이제 나라, 시, 지방자치단체, 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기관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인천아트플랫폼, 금천예술공장 등 많은 기관이 생겼고, 이곳에 뽑히면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일종의 등용문이 된 지 오래다. 내가 지낸 Live, Make, Share는 아티스트레지던시의 초기 기능 그 자체에 충실한 곳이었다. 그곳에 다녀온다고 알아주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아티스트에게 기대 없이 욕심 없이 자극을 주는 곳이었고 항상 그리운 곳이다. 호스트 Elise와 관심사도 스타일도 달랐지만 나는 그녀를 존경한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우리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지, 어떤 경력이 있는지가 아니었다. Live Make Share는 야망을 품고 갔다간 이내 실망할 곳이다. 시설도 지원도 항상 충분하지 못하고 낯선 환경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곳이다. 하지만 다른 풍경과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면 처음 시작한 그곳이 그리워질 때 떠나면 좋을 곳이다. 야생에 살다 보면 정신도 번쩍 드는 건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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